올리브 키터리지
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저, 권상미 옮김, (주) 문학동네, 2010
1. 주인공
주인공인 올리브 키터리지는 여느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매력적이지도 않고, 사랑스럽지도 않다. 때론, 동네 마을 주민들이 올리브를 불편하게 여기는 시각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더욱더 감정 이입이 될 정도이다. 하지만, 이 점은 이 소설의 가장 절묘하고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올리브는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고 따뜻함을 선사해주진 않았지만, 마지막에는 그녀도 한낱 외로운 인간이었을 뿐이며, 그저 남들이 갖추고 있는 ‘가면’을 가지고 있지 않은 어찌 보면 올곧게 순진하며 고집스러운 인간인 뿐이다. 이런 고집스럽고 투박한 여인이 중년에서 노인이 될 때까지의 여정을 순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작은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켜켜이 쌓으면서 올리브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 독자들에게 선사해준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문체는 간결하지만 날카롭게, 사실적이지만 은유적이다.
2. 단편들
이 소설이 주는 마성 중 하나는 바다가 보이는 작은 항구마을인 크로스비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모자이크처럼 얽히고 섥히기도 하면서 각각 하나의 단편들처럼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중 한 번씩은 이름이 언급되는 이는 바로 이 마을의 학교 교사였던 올리브 키터리지이다.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올리브는 중요한 비중으로 나오고, 누군가의 이야기에서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인물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넘겨질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리브 키터리지의 카리스마는(그의 큰 키나 덩치 등 육체적인 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과는 별개로) 그들의 삶에 미세하게 균열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런 삶의 균열을 일으키는 존재이기에 이 소설의 제목은 “올리브 키터리지”가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첫 번째 이야기가 올리브의 남편인 헨리 키터리지의 이야기인 것은 그녀의 스타일을 가장 옆에서 지켜보며 그녀에 대한 그 누구도 아닌 삶의 ‘동반자’의 시각에서 바라봄으로 해서 그녀에 대한 함축적인 서사를 보여줌과 동시에 가장 가까운 이 조차도 올리브에 대한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줌으로 해서 독자들이 올리브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끔, 심호흡을 할 수 있게끔 해주는 영리한 배치였다.
3. 우울증
올리브의 아버지는 자살했다. 올리브의 아들인 크리스토퍼는 늘 우울감을 가지고 산다고 올리브는 믿는다. 올리브의 남편인 헨리는 지나치게 밝고 모든 이들에게 자상하고 따스하며 친절하다. 하지만 올리브는 헨리의 어머니가 분명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등크로스비 사람 중 하나였던 케빈은 어머니가 자살했다. 케빈 역시 불안한 정서를 지니고 있다. 본인의 불안한 정서를 치유하기 위해 정신과 전문의의 길로 접어들었다. 불안의 유전, 우울의 유전 등에 대해 올리브는 떠들어대지만, 케빈은 그런 올리브가 불편한 건 본인이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싶은 마음이 커서일 것이다. 당연하다. 우리는 모두들 누군가의, 뭔가의 유전자를 지니고 물려받고 있다. 그 중 어떤 거는 빛을 발휘해 대를 이어나갈 것이고, 어떤 거는 쓸모없이 소멸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다른 형태로 이어지고 떨어지고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강한 DNA 일지라도 그런 유전적 기질이 환경과 어우러질 때야 DNA도 자신의 생명력에 날개를 다는 법이다. 그렇기에 수동적인 삶의 태도보다는 보다 적극적인 삶의 태도로 전진해 나아가야 함을 책장을 덮은 후에 알 수 있다. 마치 노인들도 젊은이들처럼 사랑을 갈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듯이.
4. 방어기제
올리브는 가족들에게 짜증을 내며, 특히 아들에 대한 사랑은 끔찍하지만 그 사랑을 표현하는데 서툴다. 그래서 때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기도 하고(하지만, 본인에게는 너무나 중요하며 섭섭한 일이다) 변덕을 부리기도 한다. 집에 간다 했다가 아들이 그럼 택시 잡아드리겠다고 하자, 어쩜 그렇게 자신을 이 집에서 내 몰수 있냐며 분노를 표출한다. 전문적인 정신과적 치료를 받은 아들 크리스는 예전처럼 엄마에게 주눅 들지도 않고, 자신의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한다. 그런 아들이 생소한 올리브는 아들을 원망했다가 아들의 치료의도 원망할 뿐,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은 그저 ‘피해자’일 뿐이다. 그러나 그녀 곁에는 늘 자신의 까칠함을 받아주는 헨리가 있었다. 헨리가 떠난 그 자리는 생각보다 컸고, 말할 사람은 필요했다. 그녀도 외로움을 잘 타는 그저 평범할 수 있는 ‘여인’이자 ‘인간’이었던 것이다. 아마 그녀는 평생 자신의 잘못을 하나하나 깨닫지 못한 채 지나갈 수도 있다. 혹은 안다 해도 사과하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노인네들은 ‘아집’이 있기 때문에. 본인이 아는 세상이 전부이고, 본인이 하는 행동만이 옳기 때문에. 그것은 늙어감에 대한 방어기제 일 수 있고, 어렴풋한 죽음의 그림자에 대한 두려움일 수 있다. “죽을 땐 제발 숨이 금세 끊어졌으면” 하고 바라는 올리브의 심정은 삶에 대한 미련의 반증일 수도 있다. 역시 방어기제. 올리브와 헨리는 크리스를 위해 아주 멋진 집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를 것이다. 크리스가 정말로 원했던 삶이었는지 말이다. 부모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그것을 몰라줌에 섭섭해 하고 자신들만 옳다고 믿는다. 자식들이 전화를 자주 안하는 것에 섭섭해 하고, 전화를 하는 것에 즐거워한다. 남에 대한 비방은 그만큼 자신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방어기제일 뿐이다. 버티고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한 방어기제. 하지만, 인정해야한다. 누구나 쓸쓸하고, 누구나 외롭고, 누구나 버텨야 한다는 사실을.
5. 기타
- 이 작품은 2009년 플리쳐상을 수상했다.
- 2014년 HBO에서 TV 미니시리즈로 제작되었다. 올리브 키터리지 역은 프랜시스 맥도널드가 맡았다. 당연히 수긍이 가는 캐스팅이다.
- 저자인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작가가 되겠다면 포기하지 말고, 포기할 수 있다면 포기하되, 포기할 수 없다면 계속 글을 쓰고 습작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정말 눈물 나고 절절히 와 닿는 조언이 아닐 수 없다. 거짓말 좀 보태서, 올리브 키터리지 작품보다 스트라우트의 조언이 더 감격스럽고 힘이 되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