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감각
1. 들어가며
풍경의 감각이라니 이 감각적인 제목만큼이나 이 책은 우리 주변의 다양한 사물, 현상들에 대한 감각적인 사유를 제시한다. 동일한 공간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겪어왔던 문화, 경험에 따라 다르게 인식된다는 기본적인 전제 위에 그 사회적 현상에 대한 문화적, 역사적 고찰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하나의 장소는 개인적인 은밀한 공간이 됨과 동시에 그 장소를 경험해본 사람들과의 수평적인 공유 기억이 될 수 있으며 역사적인 흐름에 따른 수직적인 공유 기억도 가늠해볼 수 있게 전환된다. ‘장소’라는 것이 그렇다. 어떤 물리적이고 고착화된 공간에 ‘역사’라는 시간을 부여하는 순간 이상하게 그 곳은 생동감이 넘치는 입체적인 공간으로 재탄생할 수 있으며 시간의 수직적 흐름과 동시대라는 수평적 흐름의 교차점이 된다. 그래서 그 공간에 대해 같은 형태로든 좀 다른 형태로든 기억하여 ‘공유’하는 것은 전혀 모르는 타인에 대해서도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이는 장소의 정체성이 명확하건 명확하지 않건 그 장소나 일정한 문화 현상에 대해 느꼈던 ‘공유’와 ‘동질감’이 ‘서사적 구조’와 결합할 경우‘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켰을 때 일종의 가슴 뛰는 설렘을 제공해주기도 한다 1. 따라서 이 책은 그 어떤 문화적, 장소적 공유에 대한 사적인 만남임과 동시에 공적인 연결고리를 상기시켜주는 일종의 소통의 두드림인 것이다.
2. 커피숍과 테이블
티에리 베제쿠르 씨는 서울의 커피숍과 파리의 커피숍을 비교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파리의 커피숍 이미지는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바’ 의 무미건조한 주인공 여성이 풍겨 나오는 고단함, 무신경함이 빚어낸 특유의 시크함. 동시에 길게 늘어진 노천카페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여럿 손님들의 모습들이었다. 따라서 작가가 들려준 카운터를 경계로 펼쳐지는 살아있는 ‘이야기’들의 현장이 되는 생동감 넘치는 공간이라는 점이 놀라웠다. 물론, 우리나라 대다수 카페 종업원들은 마네가 폴리 베르제르에서 구현하고 싶었던 2소비로 점철되는 공간에서 불안한 울타리를 경계선삼아 밧줄타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대다수의 카페 종업원들은 20대 초중반이며 그들은 그 직업을 자신의 천직으로 생각한다거나 평생의 업으로 여기기보다는 일상을 버틸 수 있는 일종의 경제적 가치이자 노동의 생산물인 것이다. 까페 종업원들의 이직과 퇴사 율은 매우 높으며(경험하건대 같은 커피숍에서 몇 개월 이상 장기적인 아르바이트생을 본적이 극히 드물다), 그들은 마치 익명성이 보장된 그 어떤 투명한 인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생산적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 사이의 경계를 비정규직의 최소임금을 받는 소위 ‘알바생’으로 커피숍에서 일하는 그들은 불안하고 연약한 사회적 지위를 누릴 수밖에 없으며 그런 연약함과 불안함이 기계적인 친절함으로 발현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또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한 지경의 위치에 놓인 사람들, 입시를 준비하는 사람들, 취직을 준비하는 사람들, 무언가를 준비하는 사람들 역시 커피숍을 찾아 공부를 한다. 자의건 타의건 커피숍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일상적인 풍경이며 더 이상 커피숍의 테이블은 우아하게 차를 한잔 한다거나 커피 맛을 음미하는 편안한 ‘여유’로움이 아닌 ‘공부’라는 현실적 과업의 ‘일상’적인 도구로 전이되고 있는 추세이다.
3. 공사와 건축
흔히들 유럽여행 한 번쯤 다녀온 사람들이라면 꼭 하는 말이 있다. “거긴 100년 넘은 건물들이 수두룩하더라고. 어쩜 그렇게 보존을 잘하는지,… … ” 하지만, 이 … … 에는 많은 의미들이 담겨있을 수 있다. ‘우리는 저러면 안 되겠다.’ 또는 ‘우리도 저렇게 건축 기술이 뛰어나야 할텐데’ ,‘정부가 대단하지, 그런걸 잘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걸 보니’ 등 실로 수많은 의미들이 담겨있다. 하지만 정작 가장 많이 적용되는 뜻은 ‘우리는 저러면 안 되겠다.’ 인 것 같다. 수많은 아파트 들은 당장 재건축 허가를 해달라고 아우성들이며 30년이 넘은 아파트 주민들 대다수는 화를 낸다. 그 화의 목적은 건물의 불안정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서 빨리 부시고 새로 지어달라는 것이다. 하물며 그 아파트가 아직까지 튼튼하고 견고하게 잘 지어졌다는 점 때문에 속상해하기도 한다. 베제쿠르씨도 지적했듯이 한국에서 아파트는 자기만의 ‘스윗 홈’이 아닌 자본 증식의 목표이며 대상인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람들의 단순한 개인적인 욕심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다. 연금이나 사회적 복지 혜택이 일정 소득 수준 이상인 사람들에게는 전무하다 시피 한 상황이다 보니 한 푼이라도 더 빨리, 잘 모아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주변에서도 거주용 한 채, 노후 연금용으로 한 채, 자식들 결혼 비용 마련용으로 한 채 즉 그 한 채 한 채의 의미는 다 경제적 쓸모와 연결되며 이런 경제적 쓸모가 개인으로 지출하기엔 너무 벅찬 것들이 대부분인 것이다. 사회적인 안전망이 갖춰지지 않은 사회에서는 악착같은 개인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한 쪽에서는 ‘욜로’를 외치며 풍요로운 삶을 위해 여행을 떠나거나 맛집을 탐방하다가도 어느 한 쪽에서는 ‘스투핏’을 외치며 소비를 후회하는 양 극단의 장면을 동시에 연출할 수 있다.
따라서 붕괴보다는 보존을 택하는 유럽의 건축물들을 보면 어느 순간 부럽기도 하다가 우리나라의 현상에 대입해서 살펴보면 개인의 경제적 가치 추구를 미래 가치라든가 역사적 맥락이라든가 하는 비물질적인 가치로 환산하여 제한한다는 게 쉽지는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피텔라우 쓰레기 소각장을 멋지고 환상적인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훈테르트 바서처럼 기존 건물의 무형적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끌어올릴 수 있는 작업들이 더 많은 즐거움을 선사해주지 않을까 생각도 해본다.
4. 친절한 미술관
세계 명화를 대여하여 한국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기획전은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을 거두어서 한국의 대형 미술관들은 의례 기획전을 크게 열곤 하는데 그 기획전이라는 것이 원래 그 명화들의 고향에서 봤던 감흥을 다시 한 번 재연한다기 보다는 약간의 생뚱맞음을 느끼거나 극도의 피로도를 느끼고 오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다시는 세계 명화 기획전에 관람하러 오지 않으리라 다짐한 적도 수차례 있었다. 그 이유는 베제쿠르씨가 언급한 대로 ‘전시 기획자들에 의해 부여된 관람 틀에서 벗어날 여지를 전혀 남기지 않았다’는 데에 크게 동감한다. 기획 전시를 주관하는 큐레이터들은 친절하게 우리 한국 관객들이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알고 무엇을 얻어가야 할지를 너무 강하게 주입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벽 면 한 면 빡빡하게 채워져 있는 화가의 연혁, 작품 세계, 작품의 특징들 등 친절한 설명은 고마운데 방 하나를 가득 채운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게 나의 감흥에서 보는 것인지 큐레이터의 감흥을 쫓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헷갈릴 때가 있다. 또 다른 방에 들어가면 또 벽면 하나에 가득 채운 설명과 방 하나에 빼곡하게 가득 찬 작품들. 하지만 어딘가 맥락에 맞지 않은 어색함. 작가의 연대기별이라고 하기엔 주요 작품은 또 생략되어 있고, 전시문구와 전시 작품들은 왠지 ‘나를 보고 감동받으라고’ 외치는 무언의 압력을 주는 듯하고, 나의 마음을 뺏기는 작품을 만나더라도 뭔가 어색한 조도와 벽면의 색깔 때문에 집중하기 힘든 적도 있었다. 사전지식 없이 보게 된 조르주 드 라 투르의 ‘사기꾼’, 귀스타브 쿠르베의 ‘오낭의 매장’, 카라바조의 ‘메두사의 머리’를 통해서 느끼는 전율을 느끼긴 쉽지 않았다. 작품에 대한 감흥은 극히 개인적인 맥락과 느낌 등과 작용하는 것이기에 너무 많은 정보의 주입은 온전하게 미술을 감상하는데 있어서 감정의 세포를 일깨우기 보다는 이성의 세포를 다그치는 데 주력하는 것 같다. 물론 ‘아는 만큼 보인다’ 라는 명제가 미술에 적용되기는 하나 그건 처음 만남의 충격을 뒤로 하고 두 번째 세 번째 만났을 때 온전하게 보게 되는 것 같다. 모든 작품에 대한 사전적인 정보를 모두 섭렵하고 만나면 더 가슴 벅찰 수도 있겠지만, 때론 처음 보는 사람에게 첫눈에 반하듯이 미술도 뜻밖의 작품에 마음이 더 끌릴 수도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책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폴 발레리가 말한 대로 “죽은 이미지들이 각각 자신들을 봐달라고, 자신에게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달라고 서로 질투하며 다투어대기” 때문이다. 흔치 않은 한국 전시를 위해 큐레이터들의 친절하고 답답한 마음은 이해가 가나 때론 소개팅을 나가기 전에 너무 많이 알고 가는 것보다 전혀 모르는 상태로 가는 게 더 좋은 결과를 보여줄 수 있다.
5. 랜드마크와 동대문야구장
이나라씨는 ‘랜드마크가 공동체 성원들에게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심어주기도 한다’고 언급하였다. 자하 하디드라는 스타 건축가가 디자인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서울 강북을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되고자 탄생하였지만 반대로 DDP 자리에 있던 동대문야구장과 시장터, 공장 등의 시선을 지워버린다는 주장도 소개하였다. 흔하지 않은 이 시선을 간직한 나 역시 동대문 야구장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있다. 고교야구를 한창 즐겨보던 나는 봉황대기, 황금사자기, 청룡기 등 각종 고교야구 대회를 보기 위해 동대문야구장을 종종 찾았으며 고교야구 선수들의 기록이 전무하던 시절이라 선수들의 타구 하나하나를 하나하나 손으로 기록해가며 경기를 관람하곤 하였다. 그렇기에 동대문야구장은 나의 유년시절이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20대의 반짝이던 몇 년 간의 추억이 어린 곳이었다. 따라서 동대문야구장이 재생이 아닌 철거가 되었을 때 가슴 한 구석이 아련하면서 더 이상 동대문을 찾지 않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듯 누군가에게는 멋진 랜드마크가 누군가에게는 공간과 추억, 기억을 파괴하는 슬픈 장소로 각인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가 얘기했듯이 ‘랜드마크를 짓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랜드마크가 기꺼이 대표할 공동체의 내용을 고민하는 일이고, 공동체의 사연과 기억이 거주할 장소들의 풍경을 더 세심하게 보살피는 일’인 것이다. ‘공동체의 삶과 삶의 기반, 장소의 기억을 무시한 채 랜드마크에만 공을 들인다면, 우리들의 장소는 계속 차별과 배제를 경험할 것이다.’ 라는 말 역시 깊게 와 닿는다. 물론, 리퍼블리끄 광장에서 혁명의 의미 등이 현 세대에도 고스란히 공유된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며, 서대문 형무소의 아픔을 현 시대가 똑같이 느끼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지만 최소한 그 ‘가치’에 대해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계기는 될 것이다.
소위 말하는 선진화된 나라들의 랜드마크처럼 비슷하게 모방하거나 바벨탑의 못다 이룬 꿈처럼 높게 높게 올라가는 빌딩을 세워서 건설사 대기업의 위업을 과시하는 것은 그 ‘지역’의 랜드마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랜드마크는 누군가가 임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어떤 ‘연대의식’의 기반에 만들어져 가는 거니까.
6. 서울과 나
서울에서 30년 넘게 살았고, 서울에서 초, 중, 고를 다 나왔다. 지방 사람을 친구로서 처음 만난 건 대학교 기숙사에서 만난 룸메이트였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내가 집이 서울이라고 하니 “그럼 강북이야? 강남이야?” 라고 대뜸 물었다. 나는 강남이라고 지칭되는 곳은 서울의 아주 일정부분이라고 하였지만, 그녀는 끈질기게 그럼 한강의 위쪽에 사냐, 아래쪽에 사냐 라고 물어보았다. 지리학적으로는 우리 집이 한강의 아래쪽에 해당된다고 하였더니 “그럼 강남이네!” 하였다. 난 강남에 살진 않지만 강남에 사는 사람으로 분류되길 원하지 않아서 ‘강남’의 지정학적 위치와 문화적 경계 내지는 서울의 다면성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좀처럼 쉽지는 않았다. 이 알쏭달쏭한 대화가 상경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였기에 한 동안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서울 사는 내가 지방에 대해 잘 모르듯이, 지방사는 사람들은 서울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특별히 서울에 대해 구석구석 알지는 못하고 원래 마음에 드는 곳이 생기면 그곳에만 가고 마음에 드는 음식점이 있으면 거기서만 먹고 하는지라 열심히 여기저기 탐방을 해 본 기억은 없다.
그럼에도 애장하는 장소가 몇 군데 있는데, 첫 번 째는 지금은 사라진 총신대입구역 근처에 있었던 ‘문화학교 서울’이라는 곳이다. 소위 시네마떼끄라 불리었던 이 곳은 현재 사라졌지만 이 곳에서 근무했던 분들은 ‘서울아트시네마’ 에 남아 계신 걸로 알고 있다. 이 시절에는 지금처럼 토렌토가 있던 시절도 아니고, 유투브나 인터넷에서 영화를 다운로드 받아 볼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다. 따라서 ‘사이트 앤 사운드’나 ‘키노’ 등에서 소개된 영화를 마음 놓고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냥 행복했었다. 물론 영화관처럼 커다란 스크린에 안락한 의자가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학원 강의실만한 크기의 상영실에 역시 학원에 있을 법한 의자에 앉아서 빔프로젝트로 틀어진 화면을 공부하듯이 보는 것이었다. 가격은 만원 짜리 쿠폰을 한 장 사면 영화를 한 번 볼 때마다 펀치로 구멍을 뚫어주는데 만 원짜리 쿠폰으로 영화는 네 번 정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 쿠폰을 혹여나 잃어버릴까봐 지갑 안쪽에 쑤욱 밀어 넣어서 소중한 보물 간직하듯 간직하였었다. 특히 매 월 마지막 금요일은 독립영화의 밤이라 하여 독립영화 감독들을 초대하고 그들의 영화를 틀고 관객들과 대화를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 때 봤던 감독들 중에 ‘상업영화를 만들어도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꼈던 감독이 류승완이었다. 머리가 팽팽히 돌아가던 시절이어서 그런지 그 때 봤던 영화들은 쉽사리 잊혀 지지 않는데, 그렉 아라키나 데릭 저먼, 래리 클락 등을 그 때 만났다. 총신대입구 역에서 내려 문화학교서울이 있는 건물까지 10여 분간의 거리는 그야말로 나에게 꿈의 거리이며 기쁨의 거리였던 것이다.
두 번째 장소는 지금은 사라진 코아아트홀이다. 여기서 처음 왕가위를 만났고 명성이 자자했던 타르코프스키의 ‘향수’도 봤다. 물론 이 외에 숱하게 많은 영화들을 보긴 하였지만, 고등학생인 나에게 ‘여성’성의 감성을 일깨워줬던 ‘중경삼림’은 잊지 못할 만남이었다. 또한 정규상영 말고 근근하게 영화제를 많이 기획하여 운영하였는데 토드 헤인즈의 ‘포이즌’ 역시 그 곳에서 만났다.
세 번째 장소들은 각종 문화원들이다. ‘프랑스 문화원’, ‘독일 문화원’,‘일본 문화원’ 인데, 나는 이른바 ‘정성일 키즈’ 라 할 수 있을 만큼 ‘키노’를 애지중지하며 열독하였고, 정은임의 영화음악 정성일 코너는 녹음, 필기까지 하며 들었었다. 따라서 그가 영화를 보고 배웠다는 ‘문화원’을 그냥 지나쳐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어 자막도 안 나오는 프랑스 문화원에서 장 피에르 주네의 ‘델리카트슨 사람들’, 이 외 알 수 없는 프랑스 영화들을 보곤 하였다. 일본문화원에서는 좋아하는 다케시의 초기작들 ‘그 남자 흉폭하다’ 라든가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등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뭐 이렇게 몇 번 안 가보긴 했지만 가슴 속 따뜻한 장소들이었다.
이 외에도 서울에 애장하는 장소들이 여럿 있지만, 나의 문화적 지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영화였고 이 장소들은 사라졌거나 예전과 같은 형태가 아니기에 더욱 더 아련한 추억의 장소들로 각인되고 있는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듯 장소라는 것은 언제나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는 물리적 존재가 아니라 어느 순간 심리적, 무형의 존재로 뒤바뀌게 된다. 변화가 몹시 빠른 서울에서는 더 더욱 그렇다.
7. 파리와 나
파리는 워낙 호불호가 강한 도시이다. 그 호불호는 인도만큼이나 강하다. 나에게 파리란 무지에서 비롯된 모험으로 가득 찬 도시였다. 아무 생각 없이 공항에서 숙소까지 인터넷에서만 예약할 수 있는 파리 택시를 이용하였는데 지금 같으면 우버같은 개념의 서비스였다. 문제는 영어서비스가 된다는 말과 달리 영어로 이용하는데 꽤 애를 먹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난 겁이 없는 사람이니까 내가 받은 불어 문자를 해석해 달라고 공항 직원에게 요청하였다. 내가 본 불어 문자는 꽤 길었는데 공항 직원이 해석해 준 말은 너무 짧아졌다. 하지만 그녀의 상냥한 미소에 더 이상 길게 묻지를 못하고 그녀가 알려준 대로 목적지에 행하였다. 물론 여러 번의 시행착오와 회사에 다시 전화해서 물어보고 등의 몇 번의 과정을 거친 후에 예약된 차량에 탑승할 수 있었다. 여차저차 해서 내가 도착한 숙소는 그저 싸다고 예약했던 파리 동역 근처의 아파트였다. 숙소 주변에는 노숙자들이 여럿 보였고, 커다란 유리창에 전시된 번쩍이는 총기류들이 있는 총기가게, 그 옆에 나이 든 장년층이 보드게임을 즐기고 있는 작은 가게 등이 뭔가 부조화하면서 조화롭게 움직이는 그야말로 가로등 불 빛 조차 희미한 그런 곳이었다. 그 전에 차를 타고 지나오면서 얼핏 스치면서 봤던 관광객들로 보이는 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 찬 유명 관광지와는 달리 이 지역은 그야말로 적막강산 같았다. 아무렴 어떠랴, 제일 중요한 식자재를 파는 마트가 있으면 되는 것을. 그래서 숙소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무슨 마트에서 잔뜩 장을 봤다. 너무 싼 고기와 너무 싼 와인에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마시고 먹었던 기억이 난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저녁. 루브르 미술관 주변을 거닐 때 느껴진 공기가 마치 토라진 새침한 여자 친구와 같은 느낌? 이라면 너무 생뚱맞겠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뭐 그렇게 파리는 세느강의 찬 기운이 느껴지는 도도한 여자 같은 도시였다. 그렇게 도도한 여자 친구와 짧은 연애를 마치고 떠나는 날 동역에 머물던 나는 늘 그렇듯이 길을 헤매다가 북역까지 가게 되었다. 북역에는 주로 피곤해 보이는 중동 청년들이 눈에 띄게 많이 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눈길을 사로 잡은 건 벽에 붙어있는 마티유 카소비츠의 ‘증오’ 포스터였다. 진정한 ‘증오’가 여기에 살고 있구나 싶었다. 그러면서 나는 뱅상 카셀의 얼굴과 그들의 얼굴을 눈치 채지 못하게 번갈아 가며 보게 되었다. 각국에서 몰려온 수많은 관광객들이 환호성과 탄성을 지르며 파리의 낭만을 부르짖고 파리의 사랑을 외치는 곳과 그리 멀지 않은 이 곳에서, 이들은 그런 관광, 낭만, 사랑 따위와는 전혀 거리가 없을 것 같은 일상을 견디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하철에서 수많은 종류의 라이브 음악들을 아무런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들을 수 있는 곳, 하지만 도심지와 멀어질수록 지하철의 내부의 승객들은 줄어들고, 그 특유의 지린 냄새도 강렬해진다. 어디든 마찬가지이겠지만 낭만과 일상의 고단함이 공존하는 곳, 관광객들과 관광객들에게 호객행위로 물건을 파는 흑인들, 총기상점과 보드게임 까페가 한 골목에 있는 곳, 야경이 멋진 에펠탑, 노트르담 성당에는 밤에도 화려한 빛을 내뿜지만 관광지구를 조금만 벗어나도 암흑 같은 어둠이 펼쳐지는 곳,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곳 이 곳이 파리였다. 마지막 공항 가는 날에도 나는 같은 회사의 택시를 예약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예약한 시간에 도착하여서 안심하였으나 알고 보니 동반자들을 태우기 위해 운전기사 분은 파리의 곳곳을 도셨다. 물론 곳곳은 아니었겠지만 파리의 지리를 전혀 가늠할 길이 없었기에 느낌상 파리의 구석구석을 돈 느낌이었다. 드디어 어느 집 앞에 노부부가 탑승하였다. 노부부는 친절한 미소를 건네며 인사를 하였지만, 긴 대화는 이어지지 못하고 공항까지 가는 길에 노부부와 운전기사만 신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노부부가 어디에 가는 길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보려 하니 잘 기억은 나질 않는다. 공항 앞에서 서로를 격려하며 우리는 헤어지고 나는 비행기 탑승을 위해 서둘렀다. 어리석게도 비행기 시간을 잘못 알고 있었기에 이미 체크인은 끝난 상태였고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수속을 밟을 수 있었다. 나처럼 늦게 수속한 이가 있었는데 이 분은 파리에서의 음악 유학을 마치고 이제 드디어 한국으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기분이 어떠냐고 묻자 ‘시원 섭섭’하다는 양가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어떤 도시가 안그렇겠냐만 파리는 짧게 있었던 나조차도 빛과 어둠의 공존이 느껴졌던 신기한 곳이었다. 어느 살아있는 대도시가 그러하듯이...
8. 나오면서
내가 느꼈던 그 곳에 대해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읽어본다는 건 언제나 흥미롭다. 누구나 경험과 생각이 다르듯이 느낌도 다르기에 그 느낌의 근원을 이방인의 시선에서 건져 올린 것은 색다른 접근 방식이었다. 물론, 수백 년 전부터 기행문 또는 견문록은 존재해왔다. 하지만 외국에 대한 견문록과 기행문은 ‘다녀왔다’는 우월감 속에서 생성된 것들이 대부분이며 자국 문화의 바운더리에서 타자를 평가하거나 반대로 타자에 대한 압도적 동경심에 의해 접근하기에 그 글을 읽는 제 3자들은 타국에 대한 판타지 혹은 멸시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견문록도 아니고 기행문도 아니고 도시 설명서도 아니다. ‘장소’라는 지점에 대한 맥락적 접근이며 그 ‘맥락’이 문화적, 역사적, 사회적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개인의 은밀한 경험이 더해질 때 그 ‘장소’는 더욱 꿈틀거리는 생명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나의 개인적 맥락도 덧붙이게 되는...그야말로 ‘저는 이렇습니다.’ 라고 스스로 수줍게 고백하게 만드는...
-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해석과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정체성 형성의 과정이 물체, 이미지, 글 등의 일반화된 감정들을 동반했을 때 더 잘 발현되며 이런 일반화된 감정들이 내재된 상태를 ‘서사’라고 부를 수 있다는 클라우스 에데(Klaus Eder)의 글「A theory of collective identity」에서 따온 것이다. 여기서 제시한 ‘집단적 정체성(collective identities)’은 국가 정체성 내지는 집단의 고유한 동질감의 정체성을 설명해주는 과정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국가, 사회라는 어떤 경계선보다는 물질적 형태의 공유를 영토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기 보다는 어떤 무형의 주관적 가치들이 공유될 때 그 결속력과 정체성이 공고해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본문으로]
- 마네가 무엇을 구현하고 싶었는지는 마네 본인에게 물어보지 않은 이상 알 수 없지만 작품이라는 것이 받아들이는 사람의 해석에 따라 이해되므로 내가 느끼기에 마네는 소비로 점철된 자본주의 공간에서 자본가(가게 주인)와 소비자(손님) 사이의 연결고리(종업원)이면서 그 어떤 쪽도 명확하게 분류될 수 없는 소비와 생산의 미묘한 위치에 서있는 타자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