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금지된 소설들에 대한 회고)』 아자르 나피시 지음, 이소영, 정정호 옮김, 한숲출판사, 2003 

 

   이 책은 이란 내에서 서구식 교육을 받은 여성이. 스위스-영국-미국으로 이어지는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후, 교수가 되어서 겪었던 일들을 개인적, 공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개인적인 경험들을 공적인 환경과 맥락 안에 배치시킨 뒤, 그 개인적인 경험이 공적인 환경에 의해 얼마나 좌절되고 분노를 안겨주는가를 보여주는데, 그 핵심은 ‘소설들’에 대한 작가의 순수성과 그 순수성에 대항하는 정치적 세력의 집단, 그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어린 여학우들이 느끼는 솔직한 감정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전제되어야 할 조건은, 저자인 ‘아자르 나피시’는 이란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 집안의 딸이라는 점이다. 아버지는 최연소 시장이 되었고, 삼촌과 친척들은 문단에서 유명한 이들이며, 그녀는 13살 때 처음 스위스 유학길에 올랐다. 그렇게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온 테헤란은 어릴 때 그녀가 자랐던 곳과 많이 달라져있었다. 당시 호메이니 중심의 반미, 반서구문명이 개혁의 주체가 되어서 팔레비 왕조를 몰아내고, 미국 대사관 직원들을 장기간 인질로 삼을 때였다. 

 

그래서, 사실상 ‘타자’에 가까운 나피시 교수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납득이 되질 않고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녀는 순수하게 영문학을 가르쳤지만, 그 순수성은 언제나 이슬람학생연합회라든지 대학교 교육과정 위원회 등 여러 외부적, 내부적인 요건에 부딪혀 의심을 받게 된다. 

과연, 이슬람 혁명 이후 테헤란에서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녀는 제인 오스틴의 주인공 여성들처럼 주체적으로 살길 원했으며, 의무적으로 써야 하는 베일 쓰기를 거부했기에 대학에서 해고를 당했다. 하지만 그녀는 6명의 개성 강하지만 열정이 넘치는 여제자들을 몰래 자신의 집에 초대해 매주 목요일 금기된 책들을 읽는 독서클럽을 조직한다. 이슬람 혁명 이후 억압받으며 지내왔던 소녀들은 자신들이 ‘롤리타’의 박제된 삶을 살고 있다고 공감하고 있지만, 이슬람에 대한 종교적 신념이 있던 소녀들 역시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신이 베일을 써야 한다는 사실에는 알 수 없는 상실감을 느낀다. 

그전에는 베일을 쓰는 것이 다원주의 사회에서 표현할 수 있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의 표상이었다면, 모두가 베일을 써야 하는 잿빛 도시의 ‘전제주의’ 국가에서 그들의 베일은 자신의 신념과 개성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나피시 교수는 강의시간에 베일을 써야 한다는 조항을 지키고 싶지 않아서 대학을 자의로, 타의로 그만둔다. 

그녀는 이란에서 사는 게 낯선 이에게 강간당하는 느낌이라고 항변하며 토악질을 하다 미국으로 떠난다. 1997년에. 

 

나피시 교수가 강의 중 강의실 가운데 ‘의자’를 놓고, 각각 학생들에게 ‘의자’를 묘사해보라고 한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묘사는 각양각색으로 표현된다. 나피시는 ‘소설’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라 했다. 주인공의 공감과 자신의 감정이입, 관점의 차이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며 이걸 한 가지의 ‘흑백’ 논리로, 좋은 소설, 나쁜 소설이라고 평할 수는 없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바람과 달리, 학생들은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펼치는 법을 교육받은 적이 없거나, 종교적 신념에 자신의 생각을 가둬놓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젊은 세대들은 예전 세대들이 누렸던 그 자유를 그리워하다가, 원망하기도 하고 탈출을 꿈꾸게 된다. 

이란의 각 집들은 몰래몰래 외국의 티브이를 볼 수 있는 위성 티브이를 설치하며 서구의 문화를 ‘판타지’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거나 ‘적대시화’ 한다. 역시나 이 지점에서도 흑백의 논리만 존재할 뿐이다. 

 

‘금기’에 대한 ‘판타지’는 어느 시대에서나 존재한다. 동유럽의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기 전 많은 이들은 음지에서 ‘미국’의 문화를 탐닉했었다. 나피시의 남편은 이란에서 몰래 먹는 보드카의 맛이 언제나 제일 맛있을 거라고 하였다. 그건 ‘금기’에 대한 ‘판타지’이며, 개츠비의 꿈과도 일맥상통한다. 개츠비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었으며 그 꿈은 ‘금기’라는 이름의 ‘판타지’와 결합하여 끝을 향해 달려가는 순간, 무참히도 부서졌다.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의 ‘판타지’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란은 이슬람 혁명이 일어난 후, 많은 젊은 세대들이 각각 다른 ‘판타지’를 품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급진적인 종교의 힘으로 세상을 구원하려는 ‘판타지’, 어떤 이들은 옛 시절에 누렸던 자유에 대한 노스탤지아적인 ‘판타지’, 어떤 이들은 ‘자유’라는 것이 허용되는 서구 세력에 대한 막연한 ‘판타지’ 등. 그중에서 가장 이득을 취하는 존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계속 머릿속에 남게 된다. 개츠비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그 존재들은 과연 어떤 형태로 현재 이란에서 존재하는 걸까? 

 

어쨌든, 나피시는 이란을 탈출했다. 그녀는 지식층이며 부유층이고 특권층에 가까웠으니까. 원하면 언제든지 이란을 떠날 여력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떠나서 18년간의 이란 생활을 날카로운 시선과 연민의 눈길로 666 페이지의 장대하고도 아름다운 글로 완성할 수 있게 된 것일 테다. 그리하여 어디서도 찾기 힘든 그 당시 이란의 분위기, 문학에 대한 그녀의 열정, 점점 인스턴트화 되어 가는 이 시대에 문학이 우리 사회에 주는 당면한 ‘힘’ 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기회를 나에게 까지 전달해주며 마음의 큰 파동을 선사해준다.  

하지만, 수많은 여성들은 ‘압제’와 ‘통제’된 삶 속에서 견디며 지내고 있을지, 그걸 당연한 자신의 ‘운명’이라 여길지, 이슬람 교리에 ‘충실’한 삶이라 생각할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나피시는 왜 사람들이 그토록 팔레비 왕조에 분노했는지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왜 그토록 이슬람 혁명이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는지도 설명하지 않았다. 단지, 호메이니 역시 ‘판타지’의 존재로 ‘신격화’ 되었기에 사람들이 그를 갈망하였던 게 아닐까 넌지시 이야기할 따름이다.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라는 제목이 다소 흥미를 자극함과 동시에 ‘테헤란’과 ‘롤리타’라는 두 대척점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궁금증을 자아내었는데, 굴복당한 채로 살아가야만 하는 불쌍한 아이 ‘롤리타’와 그런 롤리타를 통해 ‘판타지’를 꿈꿔온 험버트 등을 이슬람 혁명 이후의 이란인들, 특히 여성들의 삶과 대입해보면, 독서클럽의 소녀들이 왜 그토록 롤리타와 자신들의 운명을 동일시하며 감정이입을 하였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회고록에 나온 꿈들의 세계를 살펴보기 전에 나피시가 인용한 니체의 말을 재인용해보면 “괴물들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간에 그 과정에서 자신은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심연도 또한 너를 들여다본다.” 

많은 사람들은 이 점을 간과한다. 무엇이든지 간에 나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며,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봐야겠다. 니체의 의도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이 회고록에는 총 세 번의 꿈 장면이 나온다. 다 답답한 현실과 개인의 억눌러진 ‘자아’에 대한 이야기들로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1) 니마의 친구의 열 살짜리 아들이 꾼 꿈 – 꿈속에서 바닷가에 갔는데 그곳에서 남자 여자가 키스를 하고 있었고,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쩔쩔맸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부모에게 자신이 법에 어긋나는 꿈을 꾸었다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열 살짜리가 남자, 여자 키스를 하고 있는 걸 보고 흐뭇해하거나 자연스럽게 여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건 꼭 이란이 아니라도 말이다. 하지만 이 아이는 이게 다 ‘법’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체득하며 자란 아이인 것이다. 그래서 남녀의 신체접촉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고, 정작 커서도 자신의 신체적 욕망의 실체가 무엇인지 모를 때가 많을 것이다. 나스린은 라민이라는 매우 지적인 남자 친구가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신체적 욕망의 초점을 바로 알지 못했기에 나스린에게 매우 큰 상처를 주었다. 모든 행동들과 사고방식들을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얽매이게 될 경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을 수 있다. 모든 게 법망 안에서 이루어질 경우, 사고는 경직되고 유연함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열 살짜리 아이는 남녀의 키스를 보고 ‘법’을 걱정할 게 아니라, 남녀의 신체적 비밀에 놀라야 함이 정상일 테다. 

 

2) 아자르 나피시의 꿈 – 꿈속에서 달리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바로 집 대문 앞에서 발이 땅에 얼어붙어 버려서 뒤로 돌아서서 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가 숨을 수도 없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나피시는 이란의 이슬람 혁명국가 하에 자유의 억압, 흑백의 논리, 지식인들의 상실감, 등 통제된 사회에 대해 꽤나 큰 혐오를 느끼며 고통스럽게 지냈다. 그녀가 더 일찍 떠날 수 있지 않고 18년이나 버텨온 건 순전히 남편의 의지였을 거라 추측해본다. 남편 비잔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란인으로서 이란을 지키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8년간의 이란-이라크 전쟁, 바로 이웃집으로 날라든 공습, 불시에 찾아오는 혁명수비대 등 모든 것들이 이란이라는 땅을, 자신의 온전히 개인적인 공간인 집 마저 침해당하고 있다는 생각은 끝도 없이 그녀에게 좌절감을 맛보게 하였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는 13세 때부터 스위스-영국-미국을 돌며 공부한 매우 현대적인 여성 아니던가! 움쩍달싹 못하는 그녀의 꿈은 자유롭게 달리고 싶은 그녀의 지적 욕구를 억누르는 이란의 체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그녀가 얼마나 새로운 체제에 고통을 겪고 있는지, 이란-이라크 전쟁이 남겨준 상흔들이 더욱더 큰 지적 열패감을 느끼게 되었는지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그녀의 무의식이다. 

 

3) 미트라의 꿈 – 온 집이 흔들리고 있다는 생각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미트라는 남편과 함께 캐나다 이민 준비 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어머니는 반대를 하는 와중이었고, 남편은 이란에서 자리를 잘 잡고 살고 있었는데, 캐나다에 가면 맨땅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고국을 떠난다는 건 꽤 어려운 일일 수도 있지만, 고국이 견디기 힘든 땅이 되면, 떠나는 것은 손쉬운 해결책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든 일에 있어서 완벽한 해결책은 없듯이, 그들은 타국 땅에서는 또 다른 ‘타자’로 살아가야 함을 감수해야 한다. 물론, 이거와 저거를 비교했을 때, 어떤 것을 감내해야 살아야 하는지는 본인 선택의 몫일 테다. 

미트라는 아직 정착되지 않은 삶, 흔들리는 남편, 불투명한 미래. 이 모든 것들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이니 당연히 집이 흔들렸을 거다. 

 

그러나 혼돈의 삶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법이고, 남들과 그걸 비교해서 ‘당신은 편안한 삶이잖소’라고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저자인 나피시가 이야기했듯이, “다른 사람들의 슬픔이나 기쁨은 우리 자신의 슬픔이나 기쁨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렇게 ‘공감’과 ‘감정이입’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역시나 다시 문학작품으로 되돌아 가서 나피시는 “모든 위대한 소설 작품에는 그들이 묘사하는 냉혹한 현실과 상관없이 그러한 삶의 무상함에 본질적으로 대항하는 삶에 대한 확신이 있다. 삶에 대한 이런 확신은 작가가 현실을 자기 식으로 다시 말하고,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세계를 창출함으로써 현실을 지배하게 되는 그런 방식에 들어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삶에 대한 확신’이 그 무엇보다도 필요한 시기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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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onatine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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